La Rakonto de Nebela Koro

2010.06.12 04:10

La Rakonto de Nebela Koro
La Falanta Vespero
verkita de Kaori Ekuni | tradukita de Kim Na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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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ŭskultante piano-ludaĵon komponitan de Bach luditan de Glenn Gould mi legas la novelon. Ĉi tio estas eble bagatela rakonto. Ne havas la senton se ne amas, ne vivos. En la starpunkto de iu ino, perdi amon ne estas, ke iu viro havas alian amon. Ankaŭ la renversa situacio estas sama. Takeo, kiu forlasis Rika, kaj ankaŭ Rika, kiu finfine forlasis Takeo. La penso, kiun mi havis longe antaŭe. Se nia amo estas 'rilato de ekskluziva konfirmo', tio kiel malsamas kun la poseda rilato.

Probable ŝajnas, ke amafero de iu ĉiam komenciĝas pro celo tiri interesiĝon de malpli interesiĝanta persono al si. Kiel infano deziranta amon de siaj gepatroj en infanecaj tagoj. Do ni estas allogataj de persono indiferenta al si fatale. La fatalo estas samtempe havi profundan kompaton pri tiu persono.

Hanako. Denove estas kodo de incesto. Mi povos kompreni kial multe oni diras la teorion de Georges Bataille. Ŝi vigla kaj milda monopolas amon de multaj viroj. De Naoto, kiu estas infano lernanta en la instituto de ĉefrolulino Rika perdita amon, ĝis jam edziĝintaj viroj, neparolante pri Takeo. Sed ŝi estas soleca. Tio estas komprenebla, ĉar ŝi amas personon, kiun ne povas ami laŭleĝe.

Vivo estas vanta, se ni konstatas, ke ripeti renkonton, amon, kaj disiĝon estas vane. Tamen ni ne povas malkonstati ĝin. Tial ni devas akcepti ĝin. Kaj nia koro estas aŭ bela aŭ nebela, devu akcepti. Laŭ budhisma maniero, nur elturniĝi elirinte de ĉeno de metempsikozo estas vojo por eviti nihilismon.

Sed eble ne estos amo nealfiksiĝa. Tial profundeca mondo de SEN-SUFERO-ALFIKSIĜO-MORTO-VOJO por mi ŝajnas kvazaŭ kiel kontraŭvivaĵo. Sensuferan aŭ senvoluptan mondon alfiksiĝanta reala homo ne povas facile akcepti. Nur afektante senintencon oni klopodas fermi okulojn. Do verŝajne Rika diris "Ĉu mi transloĝiĝu." same kiel Takeo, kiu forlasis sin.

곱지 못한 마음의 이야기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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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의 바흐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소설을 읽는다. 이것은 어쩌면 사소한 이야기다.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한 여자의 처지에서 실연을 한다는 것이 곧 한 남자의 처지에서 다른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리카를 떠난 다케오도, 결국 다케오를 떠난 리카도. 오래전부터 떠올렸던 생각.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배타적 인정의 관계’라면 그것은 소유와 무엇이 다른 걸까.

어쩌면 늘 자신에게 관심이 덜한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끌어 보자는 취지에서 애정 행각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이끌린다. 치명적이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갖는다는 것과 같다.

하나코. 또 근친상간의 코드다. 왜 그토록 자주 조르주 바타유의 이론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이제 알 것 같기도 하다. 밝고 가벼운 그녀는 남자 주인공 다케오는 말할 것도 없고, 실연한 여자 주인공 리카의 학원에 다니는 어린 나오토부터 유부남인 여러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그녀는 외롭다. 그것은 물론, 합법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삶은 허무하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곱든 곱지 못하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수많은 업을 짓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길만이 허무를 벗어나는 길이다.

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사랑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의 심오한 세계는 내게 마치 반생명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고통이나 쾌락이 없는 세계를 집착투성이인 현실의 인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다만 무심한 척 지그시 눈을 감으려 노력할 뿐. 그래서 리카도 자신을 떠난 다케오처럼 “이사할까 봐.”라고 말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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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ita de Paz

Vivas kun Mito

2010.05.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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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as kun Mito

Vivas kun Mito.
Lasta oktobre la kato venis al mi kiel mito.

Vivas kun Mito.
Vivo estas plenplena de hazardo.

Vivas kun Mito.
Akraj ungoj, rondaj okuloj, kaj malglata lango.

Vivas kun Mito.
Kun mito de blovdisiĝantaj haroj kaj korpa temperaturo,

Vivas.


미토와 살고 있다

미토와 살고 있다.
지난해 시월 미신처럼 내게 찾아온 고양이.

미토와 살고 있다.
삶이란 우연으로 가득한 것.

미토와 살고 있다.
날카로운 발톱과 동그란 눈동자, 까끌까끌한 혓바닥.

미토와 살고 있다.
흩날리는 털과 체온의 미신과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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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ita de Paz

La potenco senti triston de alia ekzisto
La Netolerebla Malpezeco de la Ekzisto
verkita de Milan Kundera | tradukita de Lee jaer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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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novelo multe substrekigas. Tio komenciĝas per filozofio de la eterna reveno de Niĉeo, finiĝas per formalo de tristo kaj enhavo de feliĉo. Sed ankaŭ novelo pri malpezeco kaj pezeco. La antikva greka filozofo Parmenidēs parolas. "Malpezaĵo estas pozitiva kaj pezaĵo estas negativa."(12) Ŝajnas tiel. Ĉiam homoj en krizo pensas pri ekzisto. Kiel Sartre. Probable la verkisto pensante pri ekzisto enfaliĝus en filozofio de Parmenidēs, kiu estas filozofo de ekzisto.

Amo tial estis 'kontingenca renkontiĝo' farita de sesaj okazaĵoj por Tomas. Renkontinte Terezan, li rememoras metaforon de la forlasita bebo en la rakonto de Edipo kaj enfaliĝas en tre alta emocia imago(kompatemo). T.e. li enfaliĝas en amo. "Kiam iu virino estas gravurata sur nia poema memoro, tiam amo komenciĝas."(204) Ĉu devu fari tiel? Kiel la lasta movimento de kvarteto de Betoveno peze 'devu fari tiel'.

En Majo de 1968, kio okazie en Prago? Vestante mallogan jupon Ĉeĥaj junulinoj mokas soldatojn de Sovetio. La sceno interkovriĝas la junulinoj manifestaciantaj kun kandellumo en Koreio en Majo de 2008. Politikaj reĝimoj pli anakrnismaj ol iliaj konscioj. En hontinda realo ili estis avangardoj kaj samtempe estis necedante piedirantaj pasantoj senpasiaj kun ombleloj sur pluvanta strato. 

"Iuj, kiuj pensas, ke komunisma reĝimo en mezeŭropo estis kreita de perfektaj krimuloj, kovras fundamentan veron en mallumo. Krimeca politika reĝimo ne estas farita de krimuloj, sed farita de fanatikuloj, kiuj certe kredas ke ili trovis ununuran vojon por iri al paradizo."(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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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an Kundera, kiu mem estis juna komunisto, taksis ĉeĥan politikon post printempo de la Prago subregate de armea registaro de Sovetio. Do li rifuĝinte verkas novelon. "Personaro en mia novelo estas mia nerealigita ebleco. … elipso … Novelo ne estas konfeso de la verkisto, sed esplori homecan vivon en la mondo ŝanĝita kiel insido."(255)

Ĉeĥa historio estas ununura kiel ununura persona vivo. Malgranda lando Ĉeĥio, kiu situas sur mezeŭropo. La rezisto kontraŭ Aŭstrio, la forĵetado el fenestro en 1618, okazigis la militon dum 30 jaroj en tuta eŭropo, tamen por bohemoj la evento finiĝis kiel tragedio finfine. Tial "Historio estas malpeza kiel persona vivo, malpeza netolereble, malpeza kiel plumo, malpeza kiel plovo flugata de vento, malpeza kiel ia malaperanta aĵo morgaŭe."(257)

En la mondo de 'devu fari tiel' Sabina sentas abomenon al la masko de beleco, per kiu komunismo kovras sin, la kiĉo de komunismo. "En la reĝlando de la kiĉo koro faras diktaturon."(287) Nuntempe el la akcidento de sinkinta batalŝipo Ĉeonan registaro de LEE Myeongbak kaj registara partio Hannara-dang en Koreio eble intencas politike fari ĉi tian kiĉan impreson. Oni sentas malĝojon pri la viktimoj de la sinkinta batalŝipo. Kaj registaro kaj registara partio tion uzas por elvoki furiozon de la imagita komunumo(ŝtato) kontraŭ malamiko eĉ blokante minimuman racian suspekton.

Karenin(hundo)-n amanta "Tereza nenion volas de Karenin." "Se ni ne povas ami, ĉar ni volas ricevi amon. Alivorte, ni ne aliras al aliulo kaj postulas nur ekziston de la homo nenion postulante, sed ni volas ion alian ekster amo."(338)

Kune senti triston, ĉu la stranga feliĉo estas amo? Aŭ pro la doloro de la kaduka homeca vivo oni sentas amon? Aŭ senlime malpeza kontingenca renkontiĝo aŭ 'devu fari tiel' por ni bezonas la potencon senti triston de alia ekzisto.


다른 존재의 슬픔을 느끼는 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 이재룡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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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을 많이 긋게 하는 소설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으로 시작하여 슬픔의 형식과 행복의 내용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그러나 또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소설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가 말한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12) 그런가 보다. 위기에 처한 사람들은 늘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그러했듯이. 아마도 작가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존재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담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리하여 토마스에게는 여섯 개의 우연이 중첩된 ‘우발적 마주침’이었다. 테레사와 만나면서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버려진 아기에 대한 메타포를 떠올리던 그는 결국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동정)에 빠져든다. 즉 테레사를 사랑하게 된다.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204) 그래야만 하는가? 베토벤 4중주의 마지막 악장처럼 무겁게 ‘그래야만 한다’.

1968년 5월, 프라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미니스커트를 입고 소련 군인들을 조롱하는 체코의 젊은 여인들. 2008년 5월 촛불의 여인들과 오버랩 된다. 그들의 의식보다 뒤처진 정치 체제. 낯 뜨거운 현실에서 그들은 아방가르드였던 동시에 비 내리는 거리를 우산을 받쳐 들고 양보하지 않으며 걷는 차가운 행인들이었다.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철저하게 범죄자들의 창조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진리를 어둠 속에 은폐하고 있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202)

스스로가 청년 공산주의자였던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 군정의 지배를 받는 체코 정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망명하여 소설을 쓴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 중략 …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255)라며.

단 한 번뿐인 개인의 삶처럼 체코의 역사도 단 한 번뿐이다.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 체코. 1618년의 창외 투척 사건이라는 오스트리아에 맞선 저항은 유럽 전역을 30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지만 보헤미아 사람들에게는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257)

‘그래야만 한다’의 세계에서 사비나는 공산주의가 뒤집어쓰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가면, 공산주의라는 키치에 혐오감을 느낀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287) 작금의 천안함 사건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노리는 정치적 의도가 바로 이런 키치의 감수성일 것이다. 침몰한 군함의 희생자들에게서 느낀 슬픔을, 사건 자체에 대한 합리적 의심조차 봉쇄하는, 적에 대한 상상적 공동체의 분노로 불러일으키는 것 말이다.

카레닌(개)을 사랑하는 “테레사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338)

함께 슬픔을 느끼는 것, 그 이상한 행복이 사랑일까. 아니면 그 남루한 인간적 삶의 아픔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한없이 가벼운 우발적 마주침이든 ‘그래야만 한다’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존재의 슬픔을 느끼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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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우백에게

2010.05.17 22:25

우리의 친구 두산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故변우백 2주기 추모식에서 읽은 편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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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우백에게

우백아, 벌써 2년이 흘렀다.

네가 떠나던 날, 너무 놀라서 도무지 믿기지 않던 2008년 5월 16일.

그날 상영이의 전화를 받고도 나는 그냥 장난 전화라고 믿고 싶었어.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산업재해를 당하는 수많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함께 분노했고,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엔 우리 곁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의 모습에 울분을 터뜨렸던 우리였는데. 네가 떠나고 그제서야 알았어. 세상은 훨씬 더 차갑고 노동자의 절망은 훨씬 더 깊다는 것을.

시간이 멎은 것만 같았는데 365일, 그리고 또 365일이 지나갔구나. 그리고 나는 밥벌이를 위해 아이들이 읽을 책을 만든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렇게 슬프고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할까.

하지만 나는 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故배달호 열사의 죽음을 제 가족의 일인 양 가슴아파하며 밤을 지새우던 너.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그해, 촛불을 들고 공장 앞에 서있던 너. 이름 없는 들꽃이 봄 햇살에 아름다움을 뽐내며 들판에 향기를 가득 피우듯, 네가 없는 5월의 하늘에도 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파랗게 멍이 든다.

가끔씩 내 삶이 비루하다고 생각될 때면, 그래서 지쳐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면 책장 한 켠에 꽂아둔 너의 추모집을 꺼내어 본다. 네가 쓴 일기, 네가 쓴 플래카드, 너를 잊지 않으려 친구들이 피켓을 들고 노동청 앞에서 두산중공업 앞에서 벌였던 1인 시위며,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 5월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 너를 위한 작은 촛불을 켜고 소주 한잔을 붓던 밤들……. 그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먹먹한 가슴으로 너를 생각하면, 우백이 너는 “뭐 그깐 일로 풀 죽고 그래!”하며 내 등짝을 한 대 툭 칠 것 같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우백아! 그렇게 너는 우리 모두에게 힘을 주고 있구나. 네가 이름을 불렀던 사람들, 네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어느덧 차가운 경쟁에 지쳐 사람다운 삶의 가치를 잊으려 할 때마다 네 이름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구나. 어디서든 5월의 푸른 하늘에서는 네가 환하게 웃으며 내려다보겠지. 언제나 착한 너의 웃음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순간만큼은 나쁜 생각도 할 수 없을 거야. 우리 모두가 착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너, 너도 우리를 언제나 지켜봐 줘. 보고 싶다. 우백아.

2010년 5월 16일

너의 친구 현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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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란 무엇인가요?

에스페란토란?

1887년에 폴란드 안과 의사 자멘호프(Zamenhof, 1859-1917) 박사가 창안한 언어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언어(모어) 또는 강대국의 언어(예컨대 영어)를 강요하지 말고 쉽게 배울 수 있는 제3의 언어(에스페란토)를 쓰자는 운동입니다. 인류의 평등한 언어생활을 실현하자는 공통어 운동이지요.

세계인의 평등한 언어 생활을 위한 언어

“전 세계 사람 약 95%가 영어의 비원어민인 상황에서 영어를 통한 국제적 의사소통이 강요되는 상황은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6,000여 개의 언어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언어와 결합된 문화, 자연환경과 원주민과의 관계 또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 에스페란토를 배우는가?

에스페란토의 장점은 무엇보다 쉽고 간단한 문법체계입니다. 에스페란토의 문법은 16개 조항의 ‘예외 없는 규칙’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또한 에스페란토는 리눅스처럼 지적재산권이 없는 ‘오픈소스 코드’입니다. 이 언어의 보호와 발전은 아카데미오(Akademio de Esperanto)라는 에스페란토 독립기구를 통해 세계적 협력을 통해 이뤄집니다.

에스페란토는 국제적인 소통, 여행, 인터넷, 문화교류 학습, 새로운 친구 만들기, 국제대회, 외국에서의 무료 숙박과 이외의 더 많은 것들에 적합한 언어입니다.

먼 옛날 오직 ‘미친 사람들’만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또는 언젠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로지 ‘미친 사람들’만이 언젠가 모든 민중이 평화롭게 살 것이고, 자신의 국가, 민족, 지역의 언어 외에 공통의 국제적인 언어를 가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얼마나 ‘미친’ 생각일까요? 당신은 얼마나 ‘미쳐’ 있습니까?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평등한 언어에 매우 ‘미쳐’ 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에스페란토는 미래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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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ando pri limo inter Roboto kaj Homo
2058 Genezo
verkita de
Bernard Beckett |tradukita de Kim hyunwoo

De kie venis Rob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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Ĉeĥia verkisto Karel Čapek unuafoje uzis la vorton 'Roboto'. Čapek per la dramo <R.U.R. Universala Roboto de Rosuum>(ĉeĥe Rosuum's Universial roboti) uzis unuafoje la vorton 'Roboto', ĉeĥalingve 'Robota' signifas 'servuto' aŭ 'peza laboro'. Artefarita homo, kiu laboras anstataŭ homo, ŝajnas iom malpli okazigi homan identecan problemon aŭ etikan problemon ol homa klono, kiu havas homan DNA-n, aperinta en la filmo <La Klinga Kuristo>(angle Blade Runner).

Sed ĉu tia estas? Se roboto havas aman aŭ doloran senton kiel homo, kiel fariĝos? Ĉu ja homo daŭre povos ordoni roboton kiel sklavo?

Estonta mondo, kian rilaton havos inter Roboto kaj H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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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japana animada filmo aperas la demando ĉu Artefarita Intelekta Roboto havas senton. Nelonge antaŭe nuntempe per animada filmo <La Astro Knabo>(angle Astro Boy) leviĝanta <La Astra Knabo ATOM> de la reĝisoro Osamu Tezuka estas la bona ekzemplo de tia sentohavanta roboto.

Ĉi tio estis konsiderita kiel identeca problemo atinginte je reĝisoro Mamoru Oshii. Ne nur en lia fama animada filmo <La Fantomo en la Ŝelo>(攻殻機動隊; angle Ghost in the Shell), sed ankaŭ en la dua versio <La Senkulpeco >(イノセンス; angle Innocence: Ghost In The Shell) komune vivas homoj kaj ciborgoj en la estonta socio. Kaj tiuj filmoj montras nekompreneblan senton de melankolio, kiun havas robotaj figuroj.

Eĉ la filmoj demandas, ke ja kio estas signifo de la homa animo en la socio regata de reto. Se iu povas kodumi la homan cerbon per reto, ja kio estas la animo de la homo? Ĉu ĝi mem estas la atributo de la reto?

La Demando: Ĉu Roboto ne havas Animon?

Mi legis lastatempe eldonitan libron <2058 Genezo>(angle Genesis 2058). La titolo aludas ke Genesis estas genezo. 2058! Nur malpli 50 jaroj poste en proksima estonta mondo se la rapida evoluo de la Artefarita Intelekto(A.I.) ebligos mempensantan mekanismon, okazos krizo de la identeco, ke la homo falas same kiel organizita mekanismo per organikaĵo.

Laŭ 'la Tri Principoj de la Roboto' de Issac Asimov, "La Roboto ne povas difekti la homon, kaj se ne rompi antaŭan kondiĉon ĝi devu obei la ordonon de la homo, kaj se ne rompi antaŭajn du kondiĉojn ĝi devu gardi sin mem." Sed se la ideo, ke la homo havas dignecon, estas surbazita de sublimeco de animo, tiam roboto havus animon, kiam disfalas la premiso de la Tri Principoj, ke la Roboto estas malsupera ol la homo.

Ĉu la aperturo inter ekzistaĵo naskita biologie kaj estaĵo muntita mekanike estas sufiĉe granda tiom, kiom laŭ nuntempa nia ideo? Se la Dio kreis la homon, kaj la homo kreis la roboton, ĉu la roboto ne havas rajton defii kontraŭ la homo?

<2058 Genezo> montras diversajn trajtojn. La mondo regata de la filozofo Platon(Plato) laŭ principo de regado de prudenta racio similas kiel <1984> de George Orwell, kie regas Grandaj Fratoj(Big Brothers). Kaj la defio de Adam rezistanta kontraŭ la reĝimo levas demandon, ke ja kio estas la homo? Kiu estas mi, kio estas la homo, por kio kosmo ekzistas? Ĉi tiu libro renkontigas nin kun ĉi tiaj radikalaj demandoj. Legi ĉi tiun libron estas demandi kaj respondi pri 'vivi kiel homo' kiel la parolo de aŭtoro. Kaj daŭras demando pri nia vivo.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묻다
2058 제너시스

버나드 베켓 지음 | 김현우 옮김

로봇(Robot)은 어디에서 왔을까?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는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이다. 차페크는 <로섬의 인조인간>(Rosuum' s Universial Robots)이라는 희곡을 통해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체코어로 로보타(Robota)란 ‘강제 노역’ 또는 ‘힘든 노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인간을 대신해서 일하는 인조인간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듯 우리 인간의 DNA를 가진 복제 인간보다는 인간의 정체성 문제라든가 윤리적인 문제를 조금은 덜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로봇에게 인간처럼 사랑을 하거나 아픔을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과연 로봇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을까?

미래 세계, 로봇과 인간의 관계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요즘 애니메이션 <아스트로보이>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 감독의 <우주소년 아톰>이 그러한 감정을 가진 로봇의 사례다.

이것이 정체성 문제로까지 고민된 것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에 이르러서다. 그의 유명한 <공각기동대>뿐만 아니라 그 2탄 격인 <이노센스>의 미래 사회에 이르러서는 인간과 사이보그가 공존한다. 그리고 로봇 인물들이 가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우울함을 그려낸다.

심지어는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 영혼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이른다. 네트워크를 통해 두뇌를 해킹할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이란 과연 무엇일까? 네트워크의 속성 그 자체일까?

로봇에겐 영혼이 없는가 라는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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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간된 <2058 제너시스>라는 책을 보았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제너시스(Genesis)란 창세기다. 2058년! 불과 50년 남짓한 근미래의 세계에 AI(인공지능)의 급속한 진화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기계장치를 만들어 낸다면 인간이란 유기물로 조직된 기계장치와 동급으로 전락한다는 정체성 위기를 만들어 낸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의 3원칙’에 따르면, “로봇은 인간을 해칠 수 없고, 앞의 조건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하며, 앞의 두 경우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영혼의 숭고함에 근거한 것이라면, 로봇이 숭고한 영혼을 가질 때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저 3원칙의 전제는 허물어지고 만다.

생물학적으로 생성된 존재와 기계적으로 조립된 존재의 간극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충분히 큰 것일까? 만일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고, 인간이 로봇을 창조했다면 로봇은 인간에게 도전할 권리가 없는 것일까?

<2058 제너시스>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합리적 이성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철학자 플라톤이 지배하는 세계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닮았고, 이 체제에 저항하는 아담의 도전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묻게 만든다. 나는 누구이고, 인간은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책은 우리를 이런 근본적 질문에 맞닥뜨리게 만든다. 저자가 말하듯 이 책을 읽는 일은 ‘인간으로 사는 일’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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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tado pri amo pentrita de Historia Imagpovo
Hwang Jin Yi
verkita de Hong Seok Jung

Afiŝo de filmo <Hwang Jin Yi>

Verkisto Hong Seok Jung estas Nepo de Verdulo la Unua Hong Myeong Hui. Li havas abundajn lingvajn rimedojn en korea lingvo trans klasa tipo, trans norda kaj suda. Precipe li parolas ĉefe per la simplaj vortoj de popolo en la novelo.

Li kreis tipan personon laŭ teorio de socialisma realismo. Tiu estas Nomyi. Sed la persono ne estas tiel banala homo. Nomyi fariĝis ĉefo de bandito pro neatingebla amo. Nomyi ŝajnas kvazaŭ kiel vivanta homo legante la novelon, kvankam li estis kreita de historia imagpovo. Hwang Jin Yi pensas pri li, ke "En la mondo tia homo estas per sia spuro restiganta poemon sur la viva vojo, sed ne skribas poemon per tuĉo sur papero."(La 2a volumo 218)

Kun ĉi tia vivanta karaktero de la persono, la avantaĝo de la novelo estas profunda meditado pri amo. Post ekscio de sia naskiĝa sekreto Jin Yi konscias la kontraŭveran aspekton de nobeloj: "Okultaĵo komenciĝas tie, kie vero finiĝas. Absolutaĵo estas deklarita tie, kie vero mortas."(La 1a volumo 171) Poste ŝi fariĝis gisengo Myeong Weol(Lucida Luno). Kaj ŝi batalas per satiro kaj moko kontraŭ falsan amon kaj falsan ideologion de la regantaj homoj en Ĝoseon Dinastio.

Sed ŝi pensas pri vera amo de plebanoj kiel amo inter Goiddongyi kaj Igeumyi. "Ili sidas en senvorta silento. Ĉu vi scias la dolĉan guston de la silento fare de la amo? ... Vi, nobeloj ne povos kompreni la valoron de silento kaj kvieto de tiuj amantaj homoj. Amo parolas, eĉ kvankam ĝi fermas buŝon."(La 2a volumo 74-75)

Antaŭe Jin Yi ne amis Nomyi-n, tiam ŝi doloris pri tio. "Ho, amo estas ja nekomprenebla. Amo ne estas ricevaĵo sed donaĵo, ne gajnaĵo sed perdaĵo, ne atendaĵo sed rezignaĵo. Amo estas nur feliĉa tiam, kiam oni devas doni entute ĉion al amata homo. Do donebla Nomyi kaj nedonebla mi, inter du kiu estas feliĉa kaj kiu estas malfeliĉa." (La 2a volumo 100)

Tamen finfine ŝi sentas sian amon al Nomyi. Kaj antaŭ lia ekzekuto ŝi denove renkontas lin kaj parolas triste kaj rezignante sian deziron. "Se reciproke amas kaj ricevas amon, nelonge disiĝas. Tio estas rezono de la homa vivo, do akceptu la rezonon."(La 2a volumo 293) Amo ne estas tiel facile realigebla. Eĉ se iu povus realigi ĝin, tio ne facile permesata al fatalaj homoj.

Krome verkisto mencias, ke la teorio de Seo Kyeong Deok estas la unua materialisma filozofia teorio en Koreio. Kaj en la novelo Seo Kyeong Deok prezentas jenan 2 strofan poemon por klarigi al Hwang Jin Yi la principon de Libro de Ŝanĝoj(Choui).

Mallevanta luno
ĵus okcidenten transiris
ludata harpa sono
tuj damis

Hela lumo brua sono kaj
malhela kvieto unu la alian ŝanĝiĝas
do demandas. Tiaman subtilan guston
ĉu vi scias
(La 2a volumo 111)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린 사랑에 관한 명상
<황진이>
홍석중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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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o <Hwang Jin Yi>

작가 홍석중은 벽초 홍명희의 손자다. 그는 계층을 뛰어 넘고, 남북을 뛰어 넘어 한국어의 풍부한 언어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는 이 소설에서 주로 질박한 민중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이론에 따라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했다. 그 인물은 바로 놈이다. 그러나 그 인물이 그렇게 진부한 인간은 아니다. 놈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화적패의 두목이 되었다. 놈이는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지만, 소설을 따라 읽다보면 마치 살아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황진이는 그에 관해 “세상에는 먹으로 종이 우에다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자취로 인생길 우에다가 시를 남기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2권 218)라고 독백한다.

이렇게 살아 있는 인물의 성격과 함께 이 소설의 장점은 사랑에 관한 깊은 명상에 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진이는 양반들의 허위에 찬 모습을 깨닫는다. "신비한 것이 시작되는 곳에서 진실이 끝나버린다. 절대적인 것이 선언되는 곳에서 진리는 죽어버린다."(1권 171) 그 뒤로 그녀는 기생 명월이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조선 왕조의 지배계층 사람들의 거짓된 사랑과 허위 의식에 맞서 풍자와 조롱으로 싸운다.

그러나 그녀는 괴똥이와 이금이의 사랑과 같은 하층민의 진실한 사랑에 관해 생각한다. "그들은 말없는 침묵 속에 앉아 있습니다. ... 당신들, 량반님들은 저 사랑하는 사람들의 침묵과 정적의 가치를 리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입을 다물고 있어도 말을 한다고요.”(2권 74-75)

이전에 진이는 놈이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했다. "아, 사랑이란 참으로 요령부득한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요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요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념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깡그리 주어버려야만 행복한 것이니 그렇다면 줄 수 있는 놈이와 줄 수 없는 자신, 둘 중에서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 것이냐."(2권 100)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놈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참형 이전에 그녀는 다시 그를 만나 비극적으로 또 자신의 열망을 단념하면서 말한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게 되면 조만간에 갈라지는 것이 불우한 인생의 리치라니 그 리치를 받아들이자."(2권 293) 사랑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운의 사람들에게는 그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밖에 작가는 서경덕의 <이기론(理氣論)>이 한국에서 최초의 유물론 사상이었다고 언급한다. 이 소설에서 서경덕은 황진이에게 주역(周易)의 이치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연의 시를 소개한다.

지는 달이
막 서쪽으로 넘어갔고
타던 거문고 소리
금시 멎었어라

밝은 빛 시끄럽던 소리와
어둡고 적적한 것이 서로 바뀌여지니
묻노라. 이때의 미묘한 맛을
그대는 아는가
(2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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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ita de Paz

Ne rankontu vivon, vivu vivon!
Zorba La Greko
verkita de Nikos Kazantzak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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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ŭ Zorba, homo estas libero. "Li ne obstrukcate de racio vivis kun tero, akvo, besto, Dio."(201) Nikos Kazantzakis tiel priskribis pri li.

La verkisto diras sian konscion akirintan pro kunvivado kun Zorba.
- Vivo estas nur unufoja aĵo por ĉiuj. Se vi volas ĝui ĝin, nur povas en ĉi tia mondo.(248)

Zorba diras.
- Ĉu vi scias, ke kiel mi faru, se mi volas manĝi aŭ havi ion? Mi enŝovas tion en la gorĝo ŝiriĝiteble kaj faras, ke ne plu pensi pri tio. Ekstere enŝovi ne estas metodo. Ne povas per kiel stoikismo. Se vi ne iĝas duon diablo, kiel povas trakti diablon?(285-286)
- Se vi sciigos al mi, ke kion vi faras per manĝinta manĝaĵo, mi povas diri, ke kia homo vi estas. Mi uzas mian manĝaĵon por laboro kaj bona humuro.(100-101)
- Se estas io kiel patrio, homo ne eliras el la pozicio de besto, kiu nenion pensas.(330)
- Homa kapo estas sama kiel butiko de manĝomaterialoj. Daŭre kalkulas. Kiom pagis, kiom gajnis, la profito estas kioma, la malprofito estas kioma! Kapo estas etanima mastro de la butiko. Ne pensas veti tutan havaĵon nepre restigas rezervan kapitalon.(432)

Post finlego de la libro mi pensis pri la voĉo de Zorba. La celo de homo aŭ materialo estis krei plezuron, laŭ Zorba.(392)
Tio estas, ke ne rakontu vivon, vivu vivon! 
Tial Nikos Kazantzakis diras al sia malamiko(blinda neevitebleco): "Ne povas eniri en mia animo. Vi ne povas estingi mian fajron. Renversi min, absurdaĵo!"(421) 

삶을 이야기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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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다. "그는 이성(理性)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201)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렇게 그에 관해 묘사한다.

작가는 조르바와 함께 살면서 얻은 자신의 깨달음을 말한다.
-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248)

조르바는 말한다.
- 내가 뭘 멀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285-286)
-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나는 내가 먹은 걸 일과 좋은 유머에 쓴답니다.(100-101)
-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330)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432)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조르바의 목소리에 관해 생각했다.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392)
그것은 삶을 이야기하지 말고,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적(맹목적인 필연)에게 말한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어. 나를 뒤엎다니, 어림없는 수작!"(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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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ita de Paz

Kontraŭ G20 Pinta Konferenco neegaleca nedemokrata!
G20 imputas al popolaro respondecon kaj koston de financa krizo kaŭzita de Ŝtatoj kaj Entreprenoj, kaj minacas homan vivon por profito de kapitalo.
- Raporto pri Korea kaj Japana Aktivista Kunsido de Esperanto 2010 kaj konversacio kontraŭ G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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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kde la 19a ĝis 21a de Marto, 2010, dum 3 tagoj okzis Korea kaj Japana Aktivista Kunsido de Esperanto kaj konversacio kontraŭ G20 en Popolamasa Domo en Mangwon-dong, Mapo-gu, Seulo. El Japanio 10 aktivistoj kaj ĉirkaŭ 30 koreaj aktivistoj partoprenis. Ĉi tiu evento jam havas kelkjaran historion. En 2007, japanaj aktivistoj proponis komunan batalon kontraŭ G8 Pinta Konferenco en Esperanto-kunsido. Kaj en 2008 ĉirkaŭ 15 koreaj aktivistoj partoprenis en batalo kontraŭ G8 okazita en Japanio. Ekde tiam oficiale komenciĝis solidareca agado. Post tiam japanaj aktivistoj organizis protestan agadon kontraŭ korea ambasadorejo en Tokio nome de 'Ne pardonas masakron en Yongsan' pri la tragedio en Yongsan, 2009. Kaj sekve koreaj aktivistoj protestis kontraŭ forpelada politiko de senhejmuloj el Parko Miyasita en Tokio pro la privatigado de la parko al entrepreno Nike. Surbaze de ĉi tia solidareca aktivado inter koreaj kaj japanaj aktivistoj, ĉi foja kunsido okaziĝis por palpserĉi komunan batalon kontraŭ G20 Pinta Konferenco okazota en Seulo, en la 11a ~ 12a de Novembro, 2010, kaj APEC Pinta Konferenco okazota en Jokohamo, en la 13a ~ 14a.

Aŭskultis la sperton de kontraŭbatalo kontraŭ G8 Pinta Konferenco okazita en Hokkajdo,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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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tivisto de Sangafratina Solidareco, Dopehead Zo, kiu partoprenis kontraŭbatalo kontraŭ G8 el Koreio, prezentis "La Kontraŭbatalo kontraŭ al G8 pinta konferenco, kio estis bazitaj kun amikeco kaj solidareco"-n kaj komenciĝis konversacio. Mi ne publikigos nomojn de japanaj aktivistoj ĉi tie. Japanaj aktivistoj preparis diverse pli ol 1 jaro antaŭ G8 Pinta Konferenco en Hokkajdo, 2008. Eksterlande ili organizis informan turneon vizitante kelkdekajn landojn por propagandi batalon kontraŭ G8, aktivis por konstrui tendumon internacian brigadan ĉirkaŭ lago Toya, kie estis Pinta Konferencejo, administris komunikilan centron de G8, faris propagandaĵojn, financis kaj provizis nutraĵojn, ktp. La plej malfacilaj partoj en ilia sperto estis pri polica subpremado kaj agada taktiko en la loko. En la procezo de la agado sekvis aresto, rifuzo de enlandigo, malliberigo. Kaj post aresto maksimume 23 taga enkarcerigo eblas en Japanio, do en tia situacio eĉ kverelo okazis inter japanaj aktivistoj kaj eŭropaj aktivistoj. Mi povis aŭdi aflikton de japanaj aktivistoj, kiuj ne estis aktive liberaj en polica ŝtato, Japanio. Iu aktivisto devis sole prepari internacian agadan manifestacion, kaj ĉiuj superhome devis fari pli multajn laborojn ol mem fareblajn adekvatajn laborojn. Post farado de ĉi tiuj laboroj multis sekvaj simptomoj, tamen ĉiuj fieris, ke ili faris internacian komunan agadon kontraŭ G8 Pinta Konferenco, kiu neas demokraton, kontraŭ novliberalismo, kiu disvastigas malriĉecon kaj teruron.   

Palpserĉo por egaleca interkomunikado, Aktivista Kunsido de Espera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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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 la procezo de kontraŭbatalo kontraŭ G8 Pinta Konferenco diversaj problemoj estis rimarkitaj, tamen interili precipe malegaleca interkomunikado estis indikita. En la tendumo de kontraŭ G8 Pinta Konferenco estis uzita oficial anglaligvo kaj japanalingvo. Se iuj ne povas uzi la lingvojn aŭ ne lertaj, nature ili estis fremdigitaj el batalo aŭ devis ludi pasivajn rolojn. Tial en venontaj internaciaj movadoj ni proponis uzi esperanton por pli egalecan interkomunikadon.
Paz parolis, ke Esperanto estas monda komuna lingvo, kaj faris simplan gramatikan prelegon anoncante metodon por lerni kaj uzi esperanton, kiu estas konsistita de facilaj kaj senesceptaj reguloj. Kamaradonaoto de Libera Esperanto-Asocio en Hokkajdo parolis, ke ĉiuj lingvoj estu egalrajtaj. Kaj li proponis, ke tiam palorantoj kun aliaj patrolingvoj komunikadas, kiam estas prefere, ke ili parolu la trian lingvon. Precipe li traktis pri sperto, tiam eŭropaj partoprenintoj en movado kontraŭ G8 parolis siajn insistoj per 'vireca anglalingvo', kiam pri tio oponintoj ne povis paroli opiniojn pro nur lingva problemo. Kara parolis pri historio de interŝanĝo kaj movado inter esperantistoj de Koreio, Japanio, Ĉinio en 1920 ~ 40 jardekoj. En ĉi tiu historio ni povis lerni, ke per Esperanto en orientazio vigla aktivista solidareco fariĝis jam en la epoko de Japana Imperiismo.
La 20a de Marto estis la 7a rememora tago de Iraka Milito, do okazis kontraŭmilita koncerto "Milito ne plu!". Ni direktis al kontraŭmilita koncertejo antaŭ universitato Hongik kunprenante stangetojn skribitajn esperante, japanalingve, korealingve. Sed en tiu tago, kiam tro blovis flava sablvento, arestominaco de policoj pri japanaj aktivistoj kaj polica obstaklo de la evento tre kolerigis nin. Sed ni ĝisfino partoprenis en la evento kaj iris al eta Yongsan antaŭ univ. Hongik 'Duriban' kaj partoprenis sabatan muzikfeston. Kaj japanaj aktivistoj ludis gitaron kaj drumon kantante por transdoni solidarecan mesaĝon.

Komuna agado kontraŭ G20, ekde nun komen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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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komuna batalo kontraŭ G8 tiutempa G8 Komunikila Reto ŝanĝiĝis kiel Azia Komunikila Aktivista Reto "Champon". Dojong kaj japana komunikila aktivisto kune klarigis, ke kiel komunikilaj aktivistoj evoluigis solidarecan aktivon kune okazigante ĉiujaran tendumon. Ankoraŭ nun aktivo estas ne tre forta, tamen Azia Komunikila Aktivista Reto faras debaton por komuna kontraŭbatalo kontraŭ G20 kaj APEC.
Sekve politika planulo de Popola Solidareco de Sociprogreso, KU Ĝun Mo prezentis historion de G20 Pinta Konferenco, temon de la Seula G20 Pinta Konferenco 2010, proponon de batala direkto. Li proponis, ke enlande oni faru popolan batalon kontraŭ financa tutmondigo kaj novliberalismo, kaj en sfero de orientazio oni plilarĝigu solidarecon inter alternativaj tutmondigaj movadoj.
Ĝenerala Sekretario de Popolamasa Domo, AN Seong Min klarigis pri reto de loka baza(herboradika) movado en distrikto Mapo. Li rakontis pri Seongmisan Maeul(pseŭda vilaĝo), Kandelluma Solidareco en Mapo, Sendependa Artista Asocio, Rekonstruada problemo kiel Duriban, Okcidenta Neregula Laborista Centro, Laborista Reto post striko de supermerkato Homever, loka elekto en Junio kaj elekto por edukestro, ktp.
Fine ni faris diskuton, demandon kaj respondon pri konversacio dum 3 tagoj. Mi skribas jene nur kelkajn el diversaj opinioj.
1. Faru sistemon de interŝanĝi aktivistojn en alternativaj spacoj Popolamasa Domo, Gastodomo Malplena Domo, k.a.
2. Por komuna kontraŭbatalo kontraŭ G20 kaj APEC inter Koreio kaj Japanio en ambaŭ landoj oni devos okazigi grandan manifestacion.
3. Kun rekta agado bezonas klopodo por akiri subtenon de lokaj loĝantoj.
4. Batalantoj bezonas planon kaj direkton por informi sin per sendependaj komunikiloj. La video pri aresta procezo de polico kaj arestitoj estas ĉefa solidareca agado de komunikilaj aktivistoj.      
5. Necesas slogano pri G8, G20, k.s. donas kian influon en la vivo de ordinaraj popoloj. Interacia slogano, enlanda slogano, loka slogano devas organike kunmetiĝi.
  
Komuna batalo kontraŭ G20 ankoraŭ nenio estas decidita. Tamen ĝuste de nun ni konstatas kontraŭpopolecon kaj maldemokratecon de G20 tutmonde kaj komenciĝas agado. El nia koro!


불평등, 비민주주의의 G20 정상회담 반대!
G20은 국가 기업이 초래한 금융위기의 책임과 비용을 민중에게 전가하고,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 G20 대응을 위한 한국-일본 활동가 간담회 및 2010 한일 에스페란토 활동가 대회 보고

2010년 3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서울 마포구 망원동 민중의 집에서 G20 대응을 위한 한국-일본 활동가 간담회가 열렸다. 일본에서 10명의 활동가들과 한국에서 약 30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했다. 이번 행사는 이미 몇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지난 2007년에 한국에서 열린 에스페란토 합숙 행사에서 G8 정상회담에 대한 공동투쟁이 제안되었고, 2008년 일본에서 열린 G8 반대 투쟁에 약 15명의 한국 활동가들이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연대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후 2009년 용산 참사에 대해 ‘용산 학살을 용서하지 않다’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활동가들이 한국대사관 항의 행동을 조직하였고, 도쿄 미야시타 공원의 나이키(Nike)로의 민영화에 따른 노숙인 추방 정책에 반대하는 한국 활동가들의 항의도 이어졌다. 이러한 한일 양국 활동가들의 연대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간담회는 2010년 11월 11~12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G20 정상회담과 13~1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 대응하는 공동 투쟁을 모색하는 자리로 개최되었다.

2008년 홋카이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반대 투쟁의 경험을 듣다

한국에서 G8 반대 행동에 참가했던 피자매연대 조약골의 “애정과 존중의 연대의식으로 뭉친 G8 반대 투쟁” 발제를 시작으로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일본 활동가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일본 활동가들은 2008년 홋카이도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이전에 1년이 넘는 다양한 준비를 했다. 외국에서 G8 반대 투쟁 선전을 위한 수십 개국을 방문하는 인포투어를 조직했는가하면, 정상회담장인 토야호 주변에서 국제여단의 캠프를 구축하기 위한 활동, G8 미디어 센터 운영, 선전물 제작, 자금 조달과 식료품 조달 등등. 그들의 경험 속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경찰의 탄압과 현장에서의 행동 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행동의 과정에서 체포와 입국거부, 구속이 이어졌으며, 체포 이후 최대 23일간의 구류가 가능한 상황에서 심지어 일본 활동가들과 유럽 활동가들 간의 분쟁도 발생했다. 경찰국가인 일본에서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일본 활동가들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활동가는 국제적인 행동의 집회를 혼자서 준비해야 했고, 모두가 자신이 맡을 수 있는 일보다 많은 일을 초인적으로 해내야만 했다. 이 모든 일들을 마치고 난 뒤에는 후유증도 많았지만, 그들은 빈곤과 공포를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G8 회담에 맞서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이뤄낸 것을 모두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평등한 소통을 위한 모색, 에스페란토 활동가 대회

G8 정상회담 반대 투쟁의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지적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불평등한 의사소통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G8 회담 반대 투쟁의 캠프에서는 영어와 일본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투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소극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국제연대 운동에서 더욱 평등한 소통을 이뤄가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Paz는 에스페란토가 세계 공통어이며, 간단한 문법 강의와 함께 쉽고 예외 없는 규칙으로 이뤄진 에스페란토를 배워 쓰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홋카이도 자유 에스페란토 협회의 카마라도나오토 씨는 모든 언어가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다른 모국어 사용자들과 소통할 때 제3의 언어를 사용하여 소통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유럽의 G8 반대 운동 참가자들이 ‘남성적인 영어’로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할 때, 그것에 대해 반대 의사를 가진 사람들이 오로지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의견을 말할 수 없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Kara는 1920~40년대 한국, 일본, 중국 사이에서 이뤄진 에스페란티스토들의 교류와 운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운동의 역사에서 우리는 이미 일본제국주의 시절에 동아시아에서 에스페란토를 통해 활발한 활동가들의 연대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배울 수 있었다.
3월 20일은 이라크 전쟁 7주년을 맞는 날이었기 때문에 반전 콘서트 “전쟁은 이제 그만!”이 열렸다. 우리는 에스페란토, 일본어, 한국어로 쓴 피켓을 들고 홍대 앞 반전 콘서트 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사가 몹시 불던 그날, 경찰들의 일본 활동가들에 대한 체포 협박과 행사 방해가 우리를 몹시 화나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행사를 마치고 나서 홍대 앞 작은 용산 ‘두리반’으로 가서 토요일 공연에 참석했고, 일본 활동가들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공연도 했다.

G20 대응을 위한 공동행동, 이제부터 시작이다!

G8 반대 공동투쟁 이후에 당시의 G8 미디어 네트워크는 아시아 미디어 활동가 네트워크 “짬뽕”으로 변화했다. 도영과 일본 미디어 활동가가 함께 미디어 활동가들이 함께 매년 캠프를 진행하면서 어떻게 미디어 활동가들의 연대 활동을 발전시켜 왔는지를 설명했다. 아직은 활동이 느슨한 편이지만 아시아 미디어 활동가 네트워크는 G20과 APEC 공동대응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사회진보연대 구준모 정책위원이 G20 정상회담의 역사, 2010년 서울 G20 정상회담의 의제, 투쟁 방향에 대한 제안에 대하여 발제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금융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중적 투쟁을 만들고, 동아시아 차원에서 대안세계화 운동 간의 연대를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민중의 집 안성민 사무국장은 마포지역 풀뿌리 운동의 네트워크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는 성미산 마을, 마포촛불연대, 독립예술가협회, 두리반 등 재개발문제, 서부비정규노동자센터, 홈에버 파업 이후 노동자 네트워크, 6월 지방선거 및 교육감 선거 등의 의제와 단체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3일간 진행된 간담회에 대해 질의응답과 토론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나온 여러 가지 의견들을 몇 가지만 적어본다.
1. 대안적인 공간 민중의 집, 게스트하우스 빈집 등에서 교환활동가 제도를 만들어보자.
2. G20과 APEC 한일 공동 대응을 위해 양국에서 대규모 집회가 이뤄져야 한다.
3. 직접행동과 함께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4. 투쟁하는 사람들이 독립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알리기 위한 방침이 필요하다. 경찰의 체포 과정과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영상은 미디어 활동가들의 주요한 연대활동이다.
5. 보통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G8, G20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슬로건이 필요하다. 국제적 슬로건, 국내적 슬로건, 지역적 슬로건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G20 대응을 위한 공동행동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바로 지금부터 우리는 G20의 세계적인 반민중성과 비민주성을 확인하였고 행동은 시작되고 있다.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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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ita de Paz

Amletero al libroamantoj

2010.03.10 02:02

Amletero al libroamantoj
<La Ombro de la Vento>; originala titolo <La Sombra del Viento>
verkita de Carlos Ruiz Zafón

Inter hispanlingvaj noveloj mi sciis nur <Donkiĥoto>(originale <Don Quixote>)-n verkitan de Cervantes kaj <Cent Jaroj de Soleco>(originale <Cien años de soledad>)-n de Marquez. Do ĉi tiu libro <La Ombro de la Vento> estas la tria novelo hispanlingva, kiun mi renkontis.

Ĉi tiu novelo estas labirinta kompleksa novelo enhavanta rakonton en rakonto. Unue en la libro aperas alia libro samtitolita. Tio estas <La Ombro de la Vento> de JULIÁN CARAX, kiu estas kreita de verkisto Zafón. Streĉoplena rakonto pri ĉi tiu libro en la libro konsistas grandan trunkon de la novelo. Ŝajne en ĉi tiu libro rakonto disvolviĝas laŭ mistera situacio kiel detektiva fikcio. Sed iu signife ĉi tiu libro estas, ke la verkisto konfesas sian amon al libro.

Se ni sekvas la rakonton, renkontiĝas kun du amoj. Unu estas tragedia amo de JULIÁN CARAX kaj PENELOPE, alia estas imperfekta prezenca amo de DANIEL SEMPERE kaj BEATRICE. JULIÁN amis PENELOPE-n kiel si mem, tamen tio estis defio kontraŭ du tabuoj. Du tabuoj estas pri amo inter riĉa klaso kaj malriĉa klaso, kaj pri incesto poste malkaŝiĝota. Franca filozofo Georges Bataille diris, ke "Malpermeso de incesto estas por protekti kolektivan ordon". Erotismo elektigas al individuo, kiu vivas en nekontinueco, fatalan vivon ligitan de kontinueco kiel 'Morto'. La rompo de la tabuo, la defio de JULIÁN finiĝas kiel mizera fiasko, sekve tio alkondukas al sinpereiga volo de JULIÁN. Mortigo literatura pri si mem, forviŝi ĝisfunde spuron de si mem!

Kaj fine ripetas rakonto de patro kaj filo. Al la 'Tombejo de forgesitaj libroj', kie antaŭe iris kun sia patro, DANIEL iras kun sia filo mano en mano. Ĉiu rakonto komenciĝis tie, kien finfine Zafón alkondukas legantojn en la labirinton de multaj trezoroj, kiuj briletas forgesite en onia memoro.

Post la amo kaj komploto de asistaj prezentoj kiel NURIA MONTFORT, MIKEL, FERMÍN, Familio de ALDAYA, FUMERO, k.a. la historia situacio de disfalo de la malnova nobelfamilio en Hispanio, kontrolo de kolinio en latinameriko de Hispanio, kaj Hispana Interna Milito konsistas nature epokan perspektivon.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부치는 연서(戀書)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에스파냐 어 소설 중에서 내가 아는 것은 고작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뿐이었다. 그러니 이 책 <바람의 그림자>는 내가 접한 세 번째 에스파냐 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미로처럼 얽힌 다중 액자소설이다. 우선 책 속에 제목이 같은 또 다른 책이 등장한다. 지은이 사폰이 설정한 인물 훌리안 카락스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가 그것이다. 이 책 속의 책을 둘러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룬다. 언뜻 보기에 이 책은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한 상황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책을 향한 지은이의 사랑을 고백하는 책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두 개의 사랑이 중첩된다. 하나는 훌리안 카락스와 페넬로페의 비극적인 사랑, 다른 하나는 다니엘과 베아트리스의 현재 진행형인 사랑이다. 훌리안은 페넬로페를 자신처럼 사랑했지만 그것은 두 가지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두 가지 금기란 부유한 계급과 가난한 계급의 사랑, 그리고 나중에 밝혀질 것이었지만 근친상간에 관한 것이었다.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근친상간의 금지는 집단적 질서의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에로티즘은 불연속적 삶을 살고 있는 개인이 ‘죽음’이라는 연속성에 이르는 치명적인 삶을 선택하게 한다. 그 금기에 대한 위반, 훌리안의 도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 결국 훌리안의 자기소멸적 의지로 귀결된다. 자신에 대한 문학적 살해, 자신의 흔적을 철저히 지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다니엘은 아들의 손을 잡고 간다. 그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곳, 결국 사람들에게 잊힌 채 반짝이고 있는 수많은 보물의 미로 속으로 독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는 것이다. 

누리아 몽포르트, 미켈, 페르민, 알다야 가문, 푸메로 등 탄탄한 조연들의 사랑과 음모 뒤에는 에스파냐 구 귀족 가문의 몰락과 에스파냐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경영, 에스파냐 내전의 역사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배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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